닷컴 버블이 정점으로 치닫던 1990년대 후반, 주식 시장의 전통적인 가치 평가 기준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주가가 적절한지 판단할 때 쓰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는 주가수익비율, 즉 PER입니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순이익에 비해 주가가 몇 배나 높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보는 지표인데, 당시 신생 닷컴 기업들은 이 공식을 대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모에 들어갈 '순이익' 자체가 마이너스, 즉 적자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시장이었다면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퇴출당하거나 주가가 바닥을 기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당시 월가의 애널리스트들과 투자자들은 눈앞의 폭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들을 급조해냈습니다. 이익이 없어도 기업 가치가 조 단위로 치솟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던 변형된 지표들과, 그 뒤에 숨은 통계적 착시의 실체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눈길을 돈으로 환산하다: 페이지뷰(Page View)와 방문자 수의 함정
당시 닷컴 기업들의 가치를 평가할 때 재무제표의 매출액보다 중요하게 다뤄진 지표는 '페이지뷰(PV)'와 '순 방문자 수(UV)'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 사이트에 접속해서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가 기업의 미래 가치를 결정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인터넷 초창기였던 만큼 "인터넷 공간의 영토를 먼저 점령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서사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월가에서는 "방문자 1명당 가치는 100달러" 같은 임의의 공식을 만들어 기업 가치를 산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수백억 원의 적자를 내고 있더라도 한 달 방문자가 1,000만 명이라면 이 기업의 가치는 최소 10억 달러(약 1조 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의 계산법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당시의 리포트들을 분석해보면, 이 방문자들이 실제로 지갑을 열어 물건을 살 것인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단순히 마우스 클릭 횟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기업이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는 인터넷 트래픽이 곧 매출로 연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만든 거대한 통계적 착시였습니다.
매출을 부풀리는 마법: 바터(Barter) 광고와 순매출의 왜곡
회계 장부상의 매출을 기형적으로 부풀리는 변칙적인 수법도 횡행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닷컴 기업들끼리 주고받은 '바터(물물교환) 광고'였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인터넷 쇼핑몰과 B라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서로의 홈페이지에 광고를 올려주기로 합의합니다. 이때 실제로 현금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양사는 서로에게 100만 달러짜리 광고 서비스를 판매하고 구매한 것으로 장부에 기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회사 모두 실질적인 현금 유입은 제로였지만, 장부상 매출액은 각각 100만 달러씩 늘어나는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투자자들은 기업의 현금흐름표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대신, 손익계산서 상단의 매출 성장률 그래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만 보고 "엄청나게 성장하는 혁신 기업"이라며 환호했습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숫자의 향연이었습니다.
PDR(주가꿈비율)의 시초: 미래 가치에 대한 과도한 저당
순이익이 없으니 PER(주가수익비율)을 쓸 수 없고, 매출도 미미하니 PSR(주가매출비율)로도 설명이 안 되자, 시장은 급기야 '미래의 잠재력'에 모든 가치를 베팅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증시에서 유행했던 PDR(Price Dream Ratio, 주가꿈비율)이라는 말의 실질적인 시초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전통적인 금융 전문가들이 리스크를 경고할 때마다, 닷컴 옹호론자들은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재단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5년 후, 10년 후 인터넷이 완전히 대중화되었을 때 이 기업들이 누릴 독점적 지위를 현재 가치로 당겨와 주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래 가치를 산정하는 기준은 객관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애널리스트들의 주관적인 예측과 '스토리텔링'에 의존했습니다. 낙관적인 시나리오만 가득한 보고서들이 시장에 유통되면서, 아무런 실적이 없는 신생 벤처기업들이 상장과 동시에 수십 년 업력의 제조 대기업 시가총액을 가볍게 넘어서는 기현상이 고착화되었습니다.
[핵심 요약]
닷컴 버블 시기에는 적자 기업의 평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순이익 대신 페이지뷰(PV)나 순 방문자 수(UV) 같은 트래픽 지표를 기업 가치와 직결시켰습니다.
현금 거래 없이 광고를 서로 교환하는 '바터 광고' 등을 통해 장부상 매출을 기형적으로 부풀리는 회계적 착시가 빈번하게 활용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재무 데이터 대신 미래의 막연한 잠재력과 스토리텔링에 의존하는 가치 평가가 득세하면서 시장의 거품을 극대화했습니다.
[다음 편 예고] 이처럼 숫자가 왜곡되자 기업들은 조달한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무모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닷컴 버블의 광기가 대중 마케팅의 정점과 어떻게 결합했는지, '1999년 슈퍼볼 광고와 무모한 마케팅 경쟁이 남긴 부작용'에 대해 생생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댓글
당장 돈은 못 벌지만 방문자 수가 엄청나게 많은 서비스와, 방문자는 적지만 확실하게 수익을 내는 서비스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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